저 깊고 푸른, 삶 속으로 dive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ジョゼと虎と魚たち: Josee, The Tiger And The Fish, 2003) 
   감독   이누도 잇신 / 출연  츠마부키 사토시, 이케와키 치즈루. 우에노 주리, 아라이 히로후미



 조제가 그랬듯, 세상을 살아가는 무수한 사람들은 다이빙하듯 삶 속으로 매일 곤두박질치고 있다.
 다이브 dive - 쿵.   

 '곤두박질'이란 단어가 주는 처참한 기분은 아니다. 어차피 내 안의 장애와 부족함들 중 어떠한 부분들은 내 자신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으며. 내 힘으로 극복하기엔 많은 땀과 눈물 이 필요로 한다. 

 인간이란 모두 그런 존재인 것이다. 자신이 안고있는 장애와 불안전성을 자각하지 못한 채, 어둡고 깜깜한 바다 깊 숙한 곳 에서 외로이 헤엄치고 있다가 짝을 찾아 수면 가까히 올라온다.

 이걸 두고 누군가는 '연애'라 하고 누군가는 '성장' 혹은 '변화'라고도 한다. 그 무엇이 되었든 모든 사람들이 한 번쯤 꼭 겪는 과정을 통과하는 어린 두 연인 앞에서, 그토록 내 가슴이 시리고 서늘했던 건 그 안에 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감정을 품었을 때 가졌던 기억들. 잔잔한 수면 위에 넓고 아름다웠던 파장을 그리듯 긴 떨림이 있었던 감정들. 너무나 생생히 살아났다.

 주인공 츠네오는 삶 속에 곤두박질 치는 것을 기피하려 하고 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삶의 테두리를  걷고 또 걷고 있을 뿐이다. 사실 두려워 도망치고 있었는 걸지도 모르겠다. 그는 단순한 성욕을 해소하기 위해 만나는 배드 파트너와의 관계 조차도 배고플 때 먹는 스파게티처럼 무의미하고, 호감있어 하는 또 다른 그녀는 그와의 깊은 관계를 꺼려한다. 아르바이트로 일하는 마작 게임장에 서 간간히 주고받는 시덥잖은 농담이 유일한 흥미거리일 뿐. 

 그에겐 dive가 필요했다. 무엇인가 뛰어들만한.

 그런 그에게 쿠미코(조제)가 헤엄쳐왔다. 경계심을 품은 도둑 고양이 같은 서린 눈빛과 잔뜩 심술 궂은 표정에, 손에는 식칼을 들고는 말이다. 그녀는 자기의 장애를 안고 세상과 벽을 쌓은 채, 골방에 쳐박혀 주워온 많은 책들을 읽으며 아무도 없는 골목길의 파편화된 흔적으로만 세상과 소통할 뿐이었다.

 각각 자신의 장애를 안고, 그 둘은 만났다. 그리고 사랑을 했고, 변화(혹은 성장)했고, 이별을 한다. 츠네오는 단순한 성욕의 해소가 아닌 진정한 사랑에서 시작된 연인과의 잠자리에서 한 번도 흘려보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게 되고, 사람을 진정으로 위하고 감싸 안는 법을 배우게 된다.

 조제 역시 츠네오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다. 더이상 새벽에 모포를  둘러싸고 유모차에
숨어 산책을 했던 조제가 아니다. 어둡고 깜깜한 그 곳에서 헤엄쳐 나올 수 있게된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아 하던 소설 속 상상에 그쳤던 '사랑'이란 감정에 다가가게 되었다. 츠네오의 등에 자신의 모든 것을 싣고서.  

 그러나 사랑의 시작과 함께 시작된 그들의 변화는 곧 연애의 종국을 암시한다. 그 변화는 사랑과 함께 시작했지만 그 사랑을 끝을 말하기도 했다. 언제까지나 조제의 손을 잡고, 그녀의 세상에 대한 두려움의 형상인 호랑이를 같이 보고, 상상 속 동경이었던 푸른 수족관 속 물고기들을 보고싶었지만, 시간이 흐름과 함께 점차 옅어지는 사랑의 채도는 조제의 장애가 츠네오 어깨에 점차 무겁게 느껴지게끔 했다. 결국 그는 다가오는 새로운 사랑과, 점점 감당하기 힘들어지는 조제의 영혼 앞에서 지쳐감을 느낀다. 

'휠체어 사자.. 나도 언젠간 늙어.' 

 조제 역시 마찬가지로 변한다. 츠네오 없이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운 것 이다.  게다가 자신의 존재를 버겨워하는  연인을 바라보며 겸허히 이별을 받아 들인다. 어쩌면 자신의 가명을 따온, 좋아하는 '사강'의 소설 구절을 반복해서 읽으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임을 미리 예감하고 준비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간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거야.  베르나르는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 지고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야.>

 결국 츠네오는 도망친다. 아니, 도망쳤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그 둘의 사랑은 끝이 났다. 이
별은 담백하고 쿨한 모습을 연출해냈지만, 돌아서서 터져나오는 눈물은 어쩔 수 없다. 처음으로 가슴 깊히 느끼게 해주었던 그 감정을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을까봐, 그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지금 자신의 사랑이 변색되듯이 투명해질까봐, 다시는 같이 호랑이와 물고기들을 볼 수 없음에, 또 다시 조제가 깊고 깊은 바다 밑 바닥으로 숨어버릴까봐. 

 하지만 조제는 이미 츠네오 없이 세상을 사는 법을 알고 있다.이별 후, 츠네오의 등에서 내려온 조제는 전동 휠체어를 타고 거리를 누비며, 일반인과 다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만남은 사랑의 상처를 남겼지만 그보다 더욱 빛나고 훌륭한 것들을 남긴 것이다. 

  이 영화의 모든 주제를 내포하고 있는 라스트 씬. 가장 인상깊은 장면이기도 하다. 의자에 걸터 앉아 직접 구운 생선을 정성스레 접시에 옮겨 담곤 바닥으로 쿵.

 그녀가 사라진 싱크대 위로 조제의 손이 불쑥 올려와 접시를 가져간다. 그리고 다시 그녀가 밥상까지 기어가는 소리. 카메라는 계속 같은 장면을 비춘다. 텅 빈 부엌. 아무리 일반인과 다름없는 삶을 살게 되고, 세상과 소통하는 법을 배웠더라 하더라도, 사랑하는 연인을 잃은 상실감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런 상실감이 주는 고통 위에서도 우리는 조제 같이 계속 세상과 소통을 하며 다시금 삶 속으로 dive를 해야하는 것이다.

'뭐가 보여?' '깜깜해. 그곳이 옛날에 내가 있었던 곳이야.'
'어디가?' '깊고 깊은 바다 밑 바닥.. 난 그곳에서 헤엄쳐 올라온거야.'
'뭐 때문에?' '자기랑 이 세상에서 제일 야한 짓을 하려고.'
'그렇구나.. 조제는 바다 밑에서 살고 있었구나.'
'그곳에는 빛도 소리도 없고, 바람도 불지 않고 비도 내리지 않아,....너무 고요해.'
'외롭겠다.'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갈 뿐이야.
난 두번 다시 그 곳으로는 돌아 갈 수 없겠지.
언젠가 자기가 없어지게 되면..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 처럼.
혼자서 바다 밑을 데굴데굴 굴러다니게 되겠지.하지만.. 그것도 괜찮아.'

 그 외로운 바다 속을 헤엄치다 미아가 된 조개 껍데기 처럼 바다 밑을 구른다해도 삶으로의  다이빙 그 자체는, 조제 말처럼 그것도 그런대로 나쁘진 않을 것이다. 데굴 데굴 구르며 살아가다가 조금씩 조금씩 수면 위로 헤엄쳐 오르는 성장을 반복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조제와 물고기들을 그리면서 저 깊고 푸른, 삶이란 바다를 향해 dive를 한다. 

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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